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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 호감에 관하여, 김소연

착시


당신을 착시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아름답다. 노을이 아름답게 타오르는 것이 우리 눈의 착시이듯이, 내가 보고 있는 당신이 허상인 줄 알면서도 나는 믿는다. 노을을 믿듯이.



권태


'외로움'과 '쓸쓸함'의 끝자락에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질 수 있지만, 권태는 그렇지 않다. 고독하게 파먹히고 있으면서도 파먹히는 제 살을, 대안 없이 게으르게 바라볼 때가 '권태'의 상태다. 아무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권태는 늘 만만한 상태에서 지속되고 발전된다. 권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천장을 응시하며 벽지의 연속된 무늬를 하나하나 세는 것이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에 있는 통증조차 권태에는 없다. 괴로운 상황이 괴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그 점 때문에 권태는 조금 더 위험하다. 외로움은 약 없이도 회복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약 없이 살아지지만), 권태로울 때는 최소한, 외로움이란 외투로 갈아입어야 마음을 회복할 기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무료하다


심심함과 외로움 사이에 무료함이 존재한다. 심심함에서 무료함으로, 무료함에서 외로움으로 진행되기 쉽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심심함은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아무것에도 아직 손짓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외로움은 못 견디겠다는 어떤 활달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에너지조차 없는 상태라는 점 때문에. 무료함이 아무것에도 손짓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을 향해 손짓하는 방법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며, 방법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 아직 다른 에너지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고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다

 

호감에 대한 일차적인 정서이면서도, 정확하게 분화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이 아닌) 상태를 뭉뚱그릴 때 쓰기 좋은 말이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호감이 어떤 형태인지 알기 싫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가 꺼려질 때에 흔히 쓰는 말이고, 존경에도 흠모에도, 신뢰에도 매혹에도 귀속시키기 미흡한 지점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바로 좋아한다는 표현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다는 마음 상태이거나, 이미 헤치고 지나온 것에 대해 온정을 표하는 예의바른 말이거나, 적극적으로 판단 짓기에는 미온적인 상태이거나, 더 강하고 자세한 호감의 어휘들을 비껴가기 위한 방법적 거절이거나… 이런저런 것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버려진 영역의 호감들을 아우르는 말임은 분명하다.

 

호기심

 

탐구하고 싶어지는 것. 더 알고 싶은 것. 끝없이 궁금한 것들이 쌓여가는 것. 호기심이 끝없이 연장되며 세세하게 깊어질수록 호감의 강도는 높다. 호기심은 전면적인 호감의 형태는 아니지만, 호감의 필수 구성 요소인 셈이다. 




마음사전 호감에 관하여,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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