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습득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곤
그리워했다. 그때마다 나는 흑판처럼 어두워졌다
입을 틀어막고 공손해졌다
너는 오늘 천장, 이라고 적는다
천장을 보세요 굳은살을 만지는 것처럼 딱딱한 바닥이 펼쳐져 있어요 손을 대보면 아주 고요한 안개의 깊이가 느껴져요
손바닥엔 어떤 그늘이 축축하게 묻어났는데
그 그늘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죽은 이름들을 만나 인사를 했어요
천장을 걷는 사람들에게 몽실몽실 피어난 곰팡이가
나에게로 날아와 번지고 철자 하나 잘못 쓰인 글자처럼
나는 쓱쓱 지워지고 받침 없이 끝이 없이 펼쳐지고
그러나 말더듬이의 첫 음처럼 천장은 시작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리듬이 끊긴 계절이 새벽을 밟고 오는 밤
나는 자음을 잃고
오늘과 그림자를 잃고
갑남을녀 사이에서 갑이어도 을이어도 슬프지 않았다
비과거 시제(時制)를 잊어버리고부터
나는 너의 얼룩진 지하실의 벽이고
어둠에 발을 담그고 굳어 버린 바닥이었다
작은 전구도 달지 못하고
나의 천장은 유실되었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올려다볼 천장이 없다는 것
너는 어쩌면 내게 바닥, 이라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김지녀, 잃어버린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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