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만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격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개지는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모든 색깔을 잃고 나는 물이 되어 네게로 흐르고 있었다.
난 하나의 벽이기도 했고 눈동자이기도 했고 수화기이기도 했고 손가락이기도 했고 넌 한 뼘이기도 했고 틈새이기도 했고 오후이기도 했고 입구이자 출구이기도 했고 잠시라도 네게 고여 있기 위해 소나기처럼 잠이 든다 너의 그림자 되어
아무 증명도 필요 없었다
비에 젖은 우산처럼
숨을 길게 내쉬다가 나는 그만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모두 건반이 되고 너는 한 음 한 음 정성껏 연주한다
잠시라도 네게 고여 있고 싶었지만 낮은 음으로 너무도 빨리 흘러 너는 먼발치에 있었고 네게 누르는 높은 음역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나는 더 이상 흐르지 못 했다
내 몸은 증발하기 시작하고 너는 나의 모든 음을 듣지 못하고 나도 나의 음을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정재학, 모노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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