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만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격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개지는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허수경, 이국의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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